hunahunasan’s blog

韓国や韓国語に触れよう!

1883년 조선 사절단이 미국 대통령을 만난 이유

1. 1858년 에도막부와 미국 사이에 '일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그로부터 24년 뒤인 1882년 5월에는 같은 방식(무력 과시)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2. 그 다음해 1883년 미국에서 루시어스 푸트(Foote L. H) 가 주한 공사로 조선에 최초로 부임했는데 그가 미국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며 미국방문을 요청하자 1883년 7월에 조선은 사절단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3. 이 들 사절단을 보빙사(報聘使)라고 하는데, 멤버는 현흥택(玄興澤), 최경석(崔景錫), 유길준(兪吉濬), 고영철(高永喆), 변수(邊燧), 홍영식(洪英植), 민영익(閔泳翊), 서광범(徐光範), 그리고 퍼시벌 로웰이 참가하였습니다. 퍼시벌 로웰은 통역겸 비서관으로 참가했는데 일행중 영어를 할 수 있는사람이 없어 일어통역관을 따로 대동하여 한국어-일본어-영어, 영어-일본어-한국어로 소통하였다고 합니다.

 

4. 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서 배를타고 태평양을 건너 22일간의 항해 끝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 후 호텔이라는 곳에 가서 사람을 좁은 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방이 움직여 순식간에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알고보니 엘리베이터였다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5. 이들 보빙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상공회의소에서 환영만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무려 300명이 넘는 기업인들이 참석해서 조선과의 무역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6. 그 후 사절단은 기차를 타고 대도시 뉴욕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도 도시를 구경하며 압도적인 풍경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어 보스턴과 워싱턴DC로 가서 마침내 당시 미국의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lan Arthur)를 만나게 됩니다.

재미있는것은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자 보빙사 일행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 큰 절을 하는 사진이 당시 미국 언론에 크게 실렸고, 동양에서 온 이 신기한 사절단에 대해 미국인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7. 보빙사 일행은 그 해 10월까지 미국 곳곳을 시찰하고 10월 12일에 체스터 대통령을 다시만나 고별인사를 한 후 미국을 떠났는데요, 그 후 이들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됩니다.

 

8. 보빙사로 함께 갔던 홍영식과 서광범은 조선의 개혁(쇄국을 철폐하고 근대화를 이루자는것)을 원했지만 왕비인 민비의 친척인 같은 보빙사출신의 민영익과 대립하여 결국 민영익은 칼을 맞았으나 겨우 살아남았고 홍영식은 청군에 의해 죽고,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병사합니다.

 

9. 현흥택은 무인으로 조선에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그 일원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되어있지만 사망일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최경석도 현흥택과 같은 무인출신으로 미국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이 커서 귀국한 후1885년 미국에서 가축등 농산물을 수입하여 가축개량과 재배에 착수하였습니다. 사업은 성공적이어서 수확한 다량의 야채를 외국인들에게 분배하기도 하였으나 1886년 갑자기 병사하였습니다.

 

10. 유길준은1881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됩니다. 이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하였고 다시 보빙사로 미국에 건너가서는 그대로 남아 1884년 담머 아카데미 (Governor Dummer Academy)에서 수학,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1884년 조선의 개혁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귀국하였지만 체포되었습니다. 겨우 극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연금생활을 하다가 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거기서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한국인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연결,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오가사와라섬에 유폐되었습니다. 1907년 조선에 귀국해 자택에서 은거하던 중1914년에 생을 마쳤습니다. 

 

11. 고영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될 때에 편집 실무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변수는 조선에 친일내각이 무너지자 독립당 요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고 합니다.